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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면서도 내내... "하나님, 전 이 말씀을 꼭 깨닫고 싶습니다. 그러니 진리의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깨닫도록 꼭 인도해 주세요" 기돌했었다. 어쩜... 항상 기도하는 것도 잘 못하고 자주 낙망할 적이 많은 나로썬...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를 마음에 팍~ 와닿게 깨닫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굳이 원한을 풀어달라는 이 비유를 사용한걸까? 다른 것도 아니고.. 택하신 백성의 원한이야... 하나님 속히 들어주신다고 그러셨구만... 여하튼 이 사례는 끈질길 기도의 좋은 예가 못된다는 생각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들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바로 이것저것 찾아봤느냐? 아니었다.^^
자기 전에야 비로소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현대인의 성경, 톰슨 주석 성경, 관주성경, 그냥 성경, 성경사전... niv성경, 영어사전...
이런 집착력??을 보이다니.. 내게 아주 드문 일이였다.^^
근데... 이럴 수가? 아 글쎄 작년 모범교사 상품^^으로 타온 그 성경사전 앞표지 다음장에 목사님 친필로 선생님의 수고와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김동환 목사... 이렇게 써있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얼마나 공부를 안했으면 받아온지 반년이 지나... 이제야 그걸 발견하다니?? 정말 너무하는군~
<톰슨 주석 성경내용>
눅18:1-8 불의한 재판관 비유 -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본 비유는 11:5-8에 나오는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비유'와 유사하나 그것과는 달리 17:20-37에 기록된 종말론적 사건과 관련지어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 비유를 일반적인 기도원리와 관련하여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어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졸라댈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 7,8절에 분명히 나타나있듯이 우리는 본 비유의 근본의미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중에서 고통받으며 오해당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의 원한을 받드시 풀어주신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사51:22,23, 살전4:6)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이해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 그래서 11:5-8 비유를 찾아서 읽어봤는데 이 비유야말로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는 부분 중 강청하는 기도 비유였다.^^
<그냥 성경, 아가페 출판사의 오픈성경>
18:1-8 택하신 자들의 원한,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가르킨다. 이러한 열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속성으로 기도의 동인이 된다. 기도없는 신자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간구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조속한 응답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다.
<영어성경>
근데 BUT가 아니고... HOWEVER라니? 그리고 다른 곳에선 Nevertheless라니??
<회복의 신앙이라는 책 중에서...>
혹시나 이 책에 답이 있을까 싶어서 책꽂이에 꽂혀 있던 이 책을 꺼내서 뒤적거리는데... 뜨악~~~ 어떻게 믿을 것인가 편에... 이 말씀이 선행 말씀으로 가장 먼저 나와있었다.
그렇담... 이런 기억력하군... 내 이미 이에 대한 말씀을 예전에 읽었으면서도 까마득히 까먹고 있었다는 거로군. 역시... 학습자 필요에 의한 배움이 아닐땐 배우나 마나가 되는 것이 되기 쉽상이라깐~
믿음은 삶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삶이다. 지금까지 믿음을 아홉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귀결짓는다면 믿음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발적인 행사가 아니라 지속적인 삶입니다. 믿음은 점이 아니라 선입니다. 눅18:1-8절 상반절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여기까지 무슨 말씀입니까?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가 계속 찾아가서 사정하면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한 일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거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정작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 다음입니다. 그 다음 내용이 무슨 접속사로 시작합니까? 그러나 입니다. 그러나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러나 의 뒤에 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그 앞부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나 뒤에 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8절 상반절까지는 한 번도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합니다. 불교신자도 아쉬운 일이 있으면 우리보다 더 열심히 목탁 치고 기도합니다. 무당을 찾는 사람도 우리보다 더 많이 돈 내고 열심히 굿합니다. 이처럼 아쉬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것을 참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을 이제까지 배운 것으로 표현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네가 원치 않는 상황 속에 빠져도, 네 계획이 어그러져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갖겠느냐? 하나님을 향해 네 시선을 고정시키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신실해지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네 믿음이 남에게 보이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너 자신을 가꾸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네가 정말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느냐?'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아쉬울 때 내 욕망과 필요만을 위해 주님을 찾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천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이가 꼭 젖 달라고 해야 엄마가 젖을 줍니까? 때가 되면 다 주지 않습니까? 하루 세끼 아이들이 꼭 밥을 달라고 해야 밥을 주는 부모는 참된 부모가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가운데 정말 귀한 것은 하나도 구하지 않고 얻었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매일 아침 기도하고 "믿습니다."해서 얻습니까? 우리가 기도해서 하늘의 태양이 곡물을 여물게 합니까? 우리가 기도해서 이른비나 늦은비가 내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과 직결되는 거은 하나도 기도하지 않고 얻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없어도 무관한 것들을 위해서 목숨 걸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 삶 자체가 신앙이 되도록, 내 믿음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신앙과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중적인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 때,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후회없이 떠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나의 삶 자체가 자식을 위한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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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교사 말씀 묵상시간에 이 말씀이 있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그동안 계속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어서 묵상하던 이 비유 말씀을 통해 하나님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어하지는질 비로소 어렴풋이 깨닫게 된 거 같다. 물론 지금까지도 내 이해의 정도는 100%가 못되지만... 엄청난 소득^^을 얻게 된 건 확실한 거 같다. 물론 이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 굳이 다른 사람에겐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이 비유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하는 말씀이라고 시작하는데... 그동안 이 말씀에 나온 항상이란 이 단어를 너무 한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뭐랄까?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만, 억울함이 풀릴때까지만으로 한정시켰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기도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고정시킨다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단지 기도를 필요를 채워달라고 구하는 그정도로만 평가절차시킨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었기에 한정적일 수 밖에 없었던 거 같다.
이 항상이란 단어야말로... 원한이 있을 때만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닌 원한이 있건 없건, 억울한 일을 당하건, 당하지 않건, 어려움이 있건 없건을 초월하는 시공간의 개념이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 항상이란 단어가 '기도하고'라는 단어만 수식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낙망치 말아야 할 것까지 수식하는 단어라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난, 예수님 불의한 재판관이 한 말을 인용하고 난 후에 그 다음 말씀을 '이와 같이' 나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가 아닌... 아주 중요한 '하물며'라는 단어와 '속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도하는 생활이 참으로 중요하고 게다가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한 건 맞는 말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기도를 듣고 계시는 그 분에 대한 깊은 믿음이 기본이 된 기도여야 한다는 걸 새롭게 배우게 된 거 같다. (한나는 그야말로 아들을 놓고 심령이 상하도록 기도하다가 엘리 제사장이 한말... 너의 기도를 하나님 들으셨다라는 말씀 한마디로 전혀 수색없이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그 모습이 생각난다. 분명 한나는 더이상 그 기돌 하지 않았을 꺼다.)
정말 하나님이 내 기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듣고 계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똑같은 기도를 계속 반복하진 하는 그런 낭비는 하지 않을텐데...
내 경우를 돌아보면... 동일한 제목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기도할 적이 많은데 그건... 그 기도에 대한 간절함의 표현이라기 보단... 하나님 못들으셨나보다, 아직 내 기도가 접수되지 못한 거 같다는 그런 믿음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 대부분이였다는 거다.
아.. 물론...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건 수도 없이 듣고 배웠던 말씀이지만... 지금 내게 와 닿는 이 부분은 그동안 내게 아주 중요한 것을 미쳐 노치며 기도하면서도 낙망하던 내겐 아주 중요한 의미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왜 굳이 8절 하반절에 이 말씀으로 결론짓고 있는지 그 아량 많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씀은... 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 반복하는 기도를 하기 십상인 내게 그런 기도 역시도 듣고 이루신다는 말씀처럼 들린다.^^
그냥2
위 말씀을 하셨던 예수님의 그 마음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느껴지는 것 같아서 2탄^^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택한 백성이 밤낮 잠도 안자고 깨어서 기도하는데 그걸 귀찮고 번거롭게 여기실 분이신가 말이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하실때.. "성도 여러분, 하나님한테 너무 성가시게 굴지 마십시오. 밤낮 기도하는 그런 행동은 좀 자제해 주십시오. 하나님도 좀 쉬셔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겠는가 말이다.
아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귀찮게 하고 번거롭게 해서 꼭 기도에 응답받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시겠는가 말이다.
만약 이 비유를 단편적으로만 느낀다면... 하나님은 결국?? 번거롭게 구니깐... 귀찮아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런 분으로 이미지가 추락하게 되는 거 아닌가??
항상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를 포기하고 낙망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윤...
열심히 꾸준히 하던 기도가 여전히 응답되지 못하기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기(작아졌기) 때문이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된 거 같다.(물론 이런 사실은 예전에도 머리로 알고 있던 것이긴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정말 밤낮 부르짖는 기도가 설상 끝까지 이뤄지지 않다는 할지라도, 내가 원하던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해도 결코 그 사람은 낙망할 수 없을꺼다.
어제 기도회때도 목사님 말씀하셨던 말씀 중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기도한 사람에게 주시는 복은 더 이상 그것을 가지고 근심하지 않고 더 이상 그것을 가지도 기도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찬양을 제대로 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내가 죄인임을 보게 되고,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느끼게 될 때라고 말씀하셨었다.
이것이 기도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어제 난 그동안 수없이 드려왔던, 그것도 열심히 큰 소리로 오래 시간을 드려 부르짖었던 내 기도속에 얼마나 큰 헛점들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므로 기도회에 가서 차마 아무것도 하나님께 달라고 구할 수가 없었다. 역시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내 사고 너머에 계신 분이셨다.
기도회를 마치고 홀에 올라왔는데 하연이를 만났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막~~ 자랑?을 했다. 이렇게 댑따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서, 혹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무도?? 듣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 거 같아 서운했었다는 말도 했고...
회의 때문에 은숙이랑 밥을 먹어야 한다기에... 예의상??^^ 같이 갈래? 묻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난 냉큼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왜냐면... 영락없이 이 시간 집에 가면 그동안 심취해서 보아오던 옥탑방 고양이를 보는 유혹?을 이길 수가 없을꺼 같아서... 그래서 굳이 끝날 때 들어가려고 밥을 먹으러 갔었다.
10시가 넘어서 헤어질 때 하연이가 그랬다. "지영아, 아까 해줬던 말씀... 고마워.^^"
내가 느끼는 이런 흥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내겐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한명도 없는게 아니라서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준아 내가 어제 올린 그 길다란 글을 그 시간에 사무실에서 올렸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건지 아니? 난 주일날 니들이 날 보면 물어볼 줄 알고... 노트에다 다 빽빽히 적어가지고 갔고 가방이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책은 아예 가지고 갔었단다. 언제든지 니들이 말만하면 보여주고 말해줄려고... 근데 (이하 생략) ㅎㅎㅎ
이 말씀이 물론^^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지팡이 이후에 너를 충분히 흥분시키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집에 가서 바로 이것저것 찾아봤느냐? 아니었다.^^
자기 전에야 비로소 이것저것 뒤적거렸다. 현대인의 성경, 톰슨 주석 성경, 관주성경, 그냥 성경, 성경사전... niv성경, 영어사전...
이런 집착력??을 보이다니.. 내게 아주 드문 일이였다.^^
근데... 이럴 수가? 아 글쎄 작년 모범교사 상품^^으로 타온 그 성경사전 앞표지 다음장에 목사님 친필로 선생님의 수고와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김동환 목사... 이렇게 써있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얼마나 공부를 안했으면 받아온지 반년이 지나... 이제야 그걸 발견하다니?? 정말 너무하는군~
<톰슨 주석 성경내용>
눅18:1-8 불의한 재판관 비유 -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본 비유는 11:5-8에 나오는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비유'와 유사하나 그것과는 달리 17:20-37에 기록된 종말론적 사건과 관련지어 이해되어야 한다. 즉 본 비유를 일반적인 기도원리와 관련하여 기도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간구를 들어주실 때까지 계속해서 졸라댈 필요가 있다는 식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대신 7,8절에 분명히 나타나있듯이 우리는 본 비유의 근본의미를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중에서 고통받으며 오해당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의 원한을 받드시 풀어주신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사51:22,23, 살전4:6)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이해하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 그래서 11:5-8 비유를 찾아서 읽어봤는데 이 비유야말로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는 부분 중 강청하는 기도 비유였다.^^
<그냥 성경, 아가페 출판사의 오픈성경>
18:1-8 택하신 자들의 원한,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가르킨다. 이러한 열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속성으로 기도의 동인이 된다. 기도없는 신자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간구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조속한 응답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다.
<영어성경>
근데 BUT가 아니고... HOWEVER라니? 그리고 다른 곳에선 Nevertheless라니??
<회복의 신앙이라는 책 중에서...>
혹시나 이 책에 답이 있을까 싶어서 책꽂이에 꽂혀 있던 이 책을 꺼내서 뒤적거리는데... 뜨악~~~ 어떻게 믿을 것인가 편에... 이 말씀이 선행 말씀으로 가장 먼저 나와있었다.
그렇담... 이런 기억력하군... 내 이미 이에 대한 말씀을 예전에 읽었으면서도 까마득히 까먹고 있었다는 거로군. 역시... 학습자 필요에 의한 배움이 아닐땐 배우나 마나가 되는 것이 되기 쉽상이라깐~
믿음은 삶이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삶이다. 지금까지 믿음을 아홉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귀결짓는다면 믿음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발적인 행사가 아니라 지속적인 삶입니다. 믿음은 점이 아니라 선입니다. 눅18:1-8절 상반절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여기까지 무슨 말씀입니까?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가 계속 찾아가서 사정하면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한 일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거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정작하시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 다음입니다. 그 다음 내용이 무슨 접속사로 시작합니까? 그러나 입니다. 그러나 이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그러나 의 뒤에 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그 앞부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나 뒤에 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8절 상반절까지는 한 번도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일이 있어서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합니다. 불교신자도 아쉬운 일이 있으면 우리보다 더 열심히 목탁 치고 기도합니다. 무당을 찾는 사람도 우리보다 더 많이 돈 내고 열심히 굿합니다. 이처럼 아쉬운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을 붙드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것을 참 믿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을 이제까지 배운 것으로 표현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네가 원치 않는 상황 속에 빠져도, 네 계획이 어그러져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갖겠느냐? 하나님을 향해 네 시선을 고정시키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신실해지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네 믿음이 남에게 보이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너 자신을 가꾸겠느냐? 그 상황에서도 네가 정말 자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느냐?'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아쉬울 때 내 욕망과 필요만을 위해 주님을 찾는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 천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이가 꼭 젖 달라고 해야 엄마가 젖을 줍니까? 때가 되면 다 주지 않습니까? 하루 세끼 아이들이 꼭 밥을 달라고 해야 밥을 주는 부모는 참된 부모가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가운데 정말 귀한 것은 하나도 구하지 않고 얻었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매일 아침 기도하고 "믿습니다."해서 얻습니까? 우리가 기도해서 하늘의 태양이 곡물을 여물게 합니까? 우리가 기도해서 이른비나 늦은비가 내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과 직결되는 거은 하나도 기도하지 않고 얻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우리는 없어도 무관한 것들을 위해서 목숨 걸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 삶 자체가 신앙이 되도록, 내 믿음이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신앙과 삶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중적인 삶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 때, 이 세상을 떠나는 날 후회없이 떠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나의 삶 자체가 자식을 위한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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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교사 말씀 묵상시간에 이 말씀이 있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그동안 계속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어서 묵상하던 이 비유 말씀을 통해 하나님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어하지는질 비로소 어렴풋이 깨닫게 된 거 같다. 물론 지금까지도 내 이해의 정도는 100%가 못되지만... 엄청난 소득^^을 얻게 된 건 확실한 거 같다. 물론 이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 굳이 다른 사람에겐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이 비유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하는 말씀이라고 시작하는데... 그동안 이 말씀에 나온 항상이란 이 단어를 너무 한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뭐랄까?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만, 억울함이 풀릴때까지만으로 한정시켰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기도란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고정시킨다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단지 기도를 필요를 채워달라고 구하는 그정도로만 평가절차시킨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었기에 한정적일 수 밖에 없었던 거 같다.
이 항상이란 단어야말로... 원한이 있을 때만 해당되는 것이 결코 아닌 원한이 있건 없건, 억울한 일을 당하건, 당하지 않건, 어려움이 있건 없건을 초월하는 시공간의 개념이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 항상이란 단어가 '기도하고'라는 단어만 수식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낙망치 말아야 할 것까지 수식하는 단어라는 것을...
그리고, 또 하난, 예수님 불의한 재판관이 한 말을 인용하고 난 후에 그 다음 말씀을 '이와 같이' 나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가 아닌... 아주 중요한 '하물며'라는 단어와 '속히'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도하는 생활이 참으로 중요하고 게다가 끈질기게 기도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한 건 맞는 말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기도를 듣고 계시는 그 분에 대한 깊은 믿음이 기본이 된 기도여야 한다는 걸 새롭게 배우게 된 거 같다. (한나는 그야말로 아들을 놓고 심령이 상하도록 기도하다가 엘리 제사장이 한말... 너의 기도를 하나님 들으셨다라는 말씀 한마디로 전혀 수색없이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그 모습이 생각난다. 분명 한나는 더이상 그 기돌 하지 않았을 꺼다.)
정말 하나님이 내 기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듣고 계시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에서 출발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똑같은 기도를 계속 반복하진 하는 그런 낭비는 하지 않을텐데...
내 경우를 돌아보면... 동일한 제목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기도할 적이 많은데 그건... 그 기도에 대한 간절함의 표현이라기 보단... 하나님 못들으셨나보다, 아직 내 기도가 접수되지 못한 거 같다는 그런 믿음없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 대부분이였다는 거다.
아.. 물론...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건 수도 없이 듣고 배웠던 말씀이지만... 지금 내게 와 닿는 이 부분은 그동안 내게 아주 중요한 것을 미쳐 노치며 기도하면서도 낙망하던 내겐 아주 중요한 의미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왜 굳이 8절 하반절에 이 말씀으로 결론짓고 있는지 그 아량 많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씀은... 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어 반복하는 기도를 하기 십상인 내게 그런 기도 역시도 듣고 이루신다는 말씀처럼 들린다.^^
그냥2
위 말씀을 하셨던 예수님의 그 마음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느껴지는 것 같아서 2탄^^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택한 백성이 밤낮 잠도 안자고 깨어서 기도하는데 그걸 귀찮고 번거롭게 여기실 분이신가 말이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하실때.. "성도 여러분, 하나님한테 너무 성가시게 굴지 마십시오. 밤낮 기도하는 그런 행동은 좀 자제해 주십시오. 하나님도 좀 쉬셔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시겠는가 말이다.
아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귀찮게 하고 번거롭게 해서 꼭 기도에 응답받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시겠는가 말이다.
만약 이 비유를 단편적으로만 느낀다면... 하나님은 결국?? 번거롭게 구니깐... 귀찮아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런 분으로 이미지가 추락하게 되는 거 아닌가??
항상 기도하지 못하고 기도를 포기하고 낙망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윤...
열심히 꾸준히 하던 기도가 여전히 응답되지 못하기 있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기(작아졌기) 때문이라는 걸 비로소 알게 된 거 같다.(물론 이런 사실은 예전에도 머리로 알고 있던 것이긴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믿음만 잃지 않는다면... 정말 밤낮 부르짖는 기도가 설상 끝까지 이뤄지지 않다는 할지라도, 내가 원하던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진다해도 결코 그 사람은 낙망할 수 없을꺼다.
어제 기도회때도 목사님 말씀하셨던 말씀 중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기도한 사람에게 주시는 복은 더 이상 그것을 가지고 근심하지 않고 더 이상 그것을 가지도 기도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이 있었다.
그리고 "찬양을 제대로 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우는 내가 죄인임을 보게 되고,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느끼게 될 때라고 말씀하셨었다.
이것이 기도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어제 난 그동안 수없이 드려왔던, 그것도 열심히 큰 소리로 오래 시간을 드려 부르짖었던 내 기도속에 얼마나 큰 헛점들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므로 기도회에 가서 차마 아무것도 하나님께 달라고 구할 수가 없었다. 역시나 하나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내 사고 너머에 계신 분이셨다.
기도회를 마치고 홀에 올라왔는데 하연이를 만났다.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막~~ 자랑?을 했다. 이렇게 댑따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서, 혹 듣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었는데 아무도?? 듣고자 하는 사람이 없는 거 같아 서운했었다는 말도 했고...
회의 때문에 은숙이랑 밥을 먹어야 한다기에... 예의상??^^ 같이 갈래? 묻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난 냉큼 같이 가겠다고 말했다. 왜냐면... 영락없이 이 시간 집에 가면 그동안 심취해서 보아오던 옥탑방 고양이를 보는 유혹?을 이길 수가 없을꺼 같아서... 그래서 굳이 끝날 때 들어가려고 밥을 먹으러 갔었다.
10시가 넘어서 헤어질 때 하연이가 그랬다. "지영아, 아까 해줬던 말씀... 고마워.^^"
내가 느끼는 이런 흥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내겐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한명도 없는게 아니라서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준아 내가 어제 올린 그 길다란 글을 그 시간에 사무실에서 올렸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건지 아니? 난 주일날 니들이 날 보면 물어볼 줄 알고... 노트에다 다 빽빽히 적어가지고 갔고 가방이 무거움에도 불구하고 기쁜 마음으로 책은 아예 가지고 갔었단다. 언제든지 니들이 말만하면 보여주고 말해줄려고... 근데 (이하 생략) ㅎㅎㅎ
이 말씀이 물론^^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지팡이 이후에 너를 충분히 흥분시키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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