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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시작은 92년 여름성경학교다. 유치부 보조교사... 시간이 되면 도와달라고 그래서 하기 싫지 않아 그야말로 그냥 시작했었다.
유치부에선 1년 반을 있었다. 내가 한 일이라면 단 1번의 공과공부(정교사 대타-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어요)와 간이건물(그땐 유치분 간이건물이였다) 앞에 서서 오는 아이들을 맞고 문을 열어주는 거였다. 당시 아이들은 날 문지기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문지기가 된 것은 사실 돌아가면서 하다가 그냥 나보고 한 선생님이 하라고 해서... 그래서 시작된 거였고 아무도 그만 하라는 말이 없어 그래서 계속 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난 그 일을 했었다.
유치부 때 - 한 아이랑 싸웠다. 어른이 그것도 유치부 아이랑 싸운다는 것이 좀 웃기지만... 싸운 결정적인 이유는 내게 너무 무례했기 때문이였다. 보조라고 아이까지 날 교사로 보지 않아?? 그야말로 무시를 당했다는 느낌때문에 싸움은 시작됐고 난 계속 그 아이의 잘못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 아인 절대로 굽히지 않았고 결국은 그냥 그 아일 놓아줬고 내내 마음이 편칠 못했다. 그 아이를 아침에 싸운 이후로 계속 찾았다. 다시 만나서 해결하려고... 늘 교회에 있던 그 아인 보이질 않았다. 걱정스러웠다.(나중에 물어보니 친구내서 놀았단다) 한참만에 그 아일 만났다. 가서 내가 잘못한 것을 먼저 인정하고(내가 화가 나서 그 아이의 가방을 빼앗았었다.-물론 그 아일 놓아줄 때 주었었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너도 잘못했지? 물으니깐 그렇다고 그런다. 우리의 싸움은 서로 사과하면서 끝이 났다. 난 아이랑 싸우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배운 것 같다.
94년도 고등부를 지원했다. 기대감과 떨림으로...
3년차 때 - 수련회 기간 중이였는데 전에 가르쳤던 아이들이 날 위해 노래를 직접 개사해 불러줬다. 그 황송?한 찬양을 들으면서 받았던 감동은.... 그땐 교사라고 해서 아이들이 날 참 많이 대접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 대접받음이 교사를 하는 큰 기쁨이였던 것 같다.
3년차 때 - 길에서 우리반 여학생을 우연히 봤다. 정말 놀랐다. 교회올 때 그 아인 간혹 큰 쇼핑백을 들고 오곤 했는데... 거기에 그 옷들이 담겨져 있었나 보다. 난 그 아이가 당장이라도 나쁜길?로 빠져버리면 어쩌나 염려했고,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주일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만났다. 근데 이야길 하면서 사실 내가 한 말은 거의 없었다. 남자친구 얘기와 하고 싶어하는 일에 대해 계속 듣다가... 너 정말 인기 많구나? 그래.. 넌 그 일을 잘할 것 같아... 이정도로 대화가 끝난 적이 있었다. 그당시엔 어?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셨던 것 같다. 그 아인 지금 교회에서 맡은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 한 아이랑 이야길 하기 위해 이때처럼 열심히 준비했던 적은 이후에도 없던 것 같다. 하나님이 왜 이런 방법으로 인도하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교사를 하면서 지금도 느끼는 것은 권면하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특히나 상처를 주지 않고 아이의 잘못을 찝어주는 것은 더구나...
4년차 때 - 야외예배를 가는 날이였다. 아이들이 5-6명 교횔 왔는데 다들 이유가 있어서 못간다고 그런다. 아이들에게 시간을 줬다. 다시 생각해 보고 대답해 달라고... 그래도 선약이 있다고, 피곤하다고... 성가대 때문에... 모두 못간다고 그런다. "반끼리 식사합니다."란 총무교사 광고가 왜 자꾸 생각이 나던지... 사실 학생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꿋꿋이 밥 먹을 자신이 정말 없었다.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울었더니 맘 착한 한 아이가 가겠다고 했다. 그 일을 통해 학생이 없어서 교사를 못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처음 느꼈던 것 같다. 그해 난 유난히 그 아이들과 공과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 그핸 선생님들의 변동사항이 많아서 내가 2반을 맡아야 했다. 아이들을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해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아이들은 늘? 내 맘 같지 않았다. 대우받는다거나 감동받는다거나 뿌듯함 때문에 교사를 하던 나의 환상들이 드디어? 깨지기 시작한 해였던 것 같다.
5년차 때 - 그핸 교회 공사때문에 동신기도원에서 동계수련회를 했다. 첫날은 퇴근 후 교회까지 와서 자가용이 있으신 선생님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근데 갑자기 자가용 있으신 선생님이 늦게 일이 마쳐질 것 같다고 미안해 하시며 전활하셨다. 어쩔수 없이 난 혼자 기도원을 찾아가야했다. 포천까지 가긴 했는데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길이 깜깜해 전혀 걸어갈 수 없었다. 올라갔다 내려왔다 반복하다 결국 집으로 전화를 해 기도원에 전화를 부탁했고(사실 난 동신기도원 전화번홀 알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부장집사님이 봉고를 타고 나와 주셨고...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날은 머리를 쓴다고 써서 출근전부터 다른 선생님께 여기저기 전화를 하면서 내가 포천에 도착하여 삐삐를 하면 차를 가지고 좀 데리러 와 달라 부탁했다. 전날과 같은 고생은 하지 않으려고.... 둘째날은 비가 왔다. 퇴근 후 서둘러서 기도원을 향했다. 그날은 교대서부터 의정부 북부까지 거의 계속 서서 가야 했다. 많이 지쳤다. 북부역에서 내리니깐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기도원 가는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려 약속대로 삐삘했다. 근데.... 거의 30분이 지나도 날 데리러 나오는 차는 없다. 비가 그치긴 했지만 좀 추웠고, 포천이라 그런지 길에 탱크까지 여러대 지나다니곤 했다. 결국 50분을 기다린 후 난 기도원으로 전활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삐삐가 안터지는 지역이란다. 왜 진작 전화할 생각을 못했을까?) 들어가니깐 저녁집회가 끝나버렸고 후에 조금 기도회를 할려고 한단다. 정말 얼마나 서러운지... 엉엉 울었다. 기껏 잠잘려고 이곳에 온 건가? 도대체 여길 왜 온 건가? 왜 이렇게 미련한가? 등등 내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서 화가 났었다. 근데... 그날 난 정말 생각할 수도 없을만큼 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정신없이 간 이유를 알게 됐다. 나도 몰랐는데... 내겐 안가도 된다거나 안갈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거였다. 무조건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그 일을 통해... 그동안 교사란 비전을 가지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교사란 직업으로 분명히 인도하실 것이란 나의 믿음을 깨버리시고 별 상관도 없는 직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하나님을 통하여 여전히 교사의 사명을 가진 교사임을 알 수 있었다.
5년차 때 - 원주수련회때 일이다. 한 아이랑 문제가 있었다. 그때 난 너무 많이 화가 나고 맘이 상해 버려서 이젠 교사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말했다. 난 사실 교사가 아니였다면 당연히 내 은혜받기 위해 대산을 갔었을 것이다. 교사랍시고 원주를 온 것이 정말 후회 막심이였다. 다신 원주를 안오겠다 마음 먹었다. 괜히 교사를 해 사서 이 고생을 하다니... 이런 멍텅구리.... 수련회 내내 이 시험 때문에 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이 아까운 시간(일년에 단 한번 있는 휴가를 들여서)에 내가 하나님께 구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다니... 수련회가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그 아일 놓고 기도하고 울었다. 마지막날 후집회를 위해 옥수수를 먹는 시간에 그 아이랑 화해했다. 그 아인 문제가 생긴후론 계속 날 마주 치려고도 하지 않았고 내 말은 무조건 무시하고 있었다. 함께 얘길 하려던 날 매정하게 뿌리치고 가버렸다. 근데 그 완고하던 아이가 나랑 드디어 화해를 했다. 정확히 뭘 얻어가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 아이를 중심으로 용서했다. 그리고 정말 은혜로운 수련회였다고 감사하며 상경할 수 있었다. 수련회가 몇주 지난 후 난 그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6년차 때 - 그해는 교사를 하면서 가장 힘든 해였고 가장 큰 변화가 내게 있었던 해였다. 처음으로 고3을 맡았다. 기도하면서 내가 이 아이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 알고 있었다.(이전까진 난 항상 1학년만 맡았었다) 우리반은 유난히 아이들이 안(못?)나왔다. 난 항상 아무도 안오면 어째지 걱정하면서 주일을 맞아야 했다. 스승의 날 행사를 간단히 하고 야외예배를 갔다. 근데... 아이들은 아무도 못간다고 그런다. 두명이 왔는데... 둘다 못간단다. 새벽 5시 30부터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온 나인데.... 그것도 아이들 먹을 도시락까지 대신 다 싸가지고 왔는데.... 또 아무도 안간단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꾹 참고 있었다. 어쨌든 한 아이가 끌려가게 됐고.... 얼마나 고맙던지... 그 아인 점심을 먹고 딴 친구들이랑 공부한다며 먼저 갔다. 야외예배를 마치면서 끝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반별 사진을 찍는 시간에 난 구석에 조용히 서 있어야 했다. 다행인지 사람들은 반별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여 내겐 시선을 않줬다. 난 그해 반별 사진을 찍지 못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하나님께 내가 정말 이런 교사를 왜 해야 하는지 물었다. 속이 정말 많이 상했다. 근데... 난 그때서야 처음 알게 됐다. 아이들 때문에 내가 교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때문에 교사로 존재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그래서 이정도로 낙심하는 것은 그분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나님 그분이 "야. 너 어디 시험받아 낙심이나 해라... 설마 그런 의도로 내게 교사를 맡기셨겠는가??"하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론 아이들이 안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좀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번은 또 아무도 안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난 한명도 수련회를 갔다 오지 못한 우리반 아이들을 위해서 수련회때 배워온 말씀을 다시 공부해 공과시간에 알려줄 때였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란 제목으로 공부를 해 갔는데... 아무리 아이들을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난 계속 기도하길... "하나님 이 공과는 꼭 해야 되는데요." 그리고, 난 공과를 할 수 있었다. 어쩐 일인지 한 선생님이 조금 늦게 오셨는데(늦는 선생님이 아니셨는데)... 그반 아이가 나에게 와서 "어? 선생님은 학생이 없고 저는 선생님이 없네요?... 같이 공부할까요" 제안하는 거였다. 그래서 공과했다. 그것도 6명정도의 다른 반 학생과 그반 선생님과... 거의 끝날 때 온 우리반 1명과 함께.... 그때 난 정말 교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하는 거 였구나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고등부 교사를 한지 6년만에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교사가 뭔지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동안을 돌아보니깐 정말 학생들로 인해 받은 감동과 기쁨이나 간혹 드는 뿌듯함이 내가 교사를 하는 이유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학생들로 인해 무시를 당한다거나 속상한 일들을 겪게 될땐 교사? 나 안해.. 그런 맘을 먹었던 것 같다. 교사란 것을 그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된다는 그 정도로 생각해 왔던 거였다. 그해 난 다신 원주 안가겠다던 작년의 굳은 결심?을 까마득히 잊은채 큰 기대를 가지고 수련회에 참석했고 하나님 그분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사의 기쁨을 난생처음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니가 그 일을 가장 잘하기 때문에 내 부탁하는 건 아닌데... 난 니가 그 일을 날 위해 해줬으면 정말 좋겠구나. 해 줄 수 있겠니?" 물으심에 기꺼이 "Yes"로 답하는 commitment.의 헌신을 처음 배울 수 있었다.
7년차 때 - 지난 연말부터 은연중 기도제목 하나가 아이들과 스터디하는 것였다. 마음만 있을 뿐이였다. 하곤 싶지만 시간투자할 생각을 하니... 망설였다. 그러면서 지금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근데 느닷없이 총무선생님 왈 "성경공부를 자원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선생님을 붙혀달라고 하는데 한 번 해 보시겠어요" 물으신다.(그날 난 교사회의도 못들어 갔다. 오랜만에 온 아이가 있었는데 교회를 그만다니겠다는 선언을 했기에... 아이 이야길 열심히 들어줬다. 몇 달이 지난 후 난 쪽지를 받았다 그 아이로부터...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라는 말씀이 적혀있었다.) 총무선생님의 질문에 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3 or 4월? 뭐 그때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근데 난 첫모임부터 실망했다. 한 아이왈 "선생님 고3이 2명이나 있으니깐 조금 하다 그만하죠." 말하는 거였다. 시작도 안했는데... 자원하는 아이들이 정말 말씀을 함께 나누려는 모임이라는 말을 듣고 시작했는데(사실 난 그 자원이란 말 때문에 시작한건데).... 실제 이 모임은 들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모임이름이 분명 큐티모임인데... 아이들 중엔 큐티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큐티를 안하고 있는 아이가 거의 다였다. 시작하긴 했지만... 사실 나로썬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괜히 한다고 했군.... 계속 후회했다. 더욱이 좀 쉴수 있는 토요일 오후시간을 청년부도 안나가고 있던 내가 그것도 왕복 2시간 반을 걸려 매주 나가야 한다는 것이.... 고3아이 2명과 상의했다... 너희들이 언제라고 그만하고 싶다면 난 그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쁨 맘으로 OK할꺼라고... 그랬더니 그 아이들왈 계속 하잖다. 어쩔 수 없이 난 너희들이 단 한명이라도 하자고 한다면 그 한명을 위해서라도 나오겠다고 약속을 해버렸다. 우리 모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수련회를 갔다온 후였다. 그쯤엔 한명만이 나왔다. 2시간정도 함께 생활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는데....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깨달아 내게 그들이 깨달은 것을 나눠준다. 또한 그들속에서 크진 않지만 작은변화가 보여졌다. 당연히 그 변화의 원동력은 말씀이였고... 여지껏 7년동안을 고등부안에서 있었는데... 이 모임처럼 말씀을 함께 나누는 기쁨을 누렸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어느때서부턴가 그 모임을 갈 때 난 교사로 가지 않게 됐다. 사실 그 모임엔 교사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난 사실 이 모임에 참석하면서부터 하나님께 말씀을 잘 깨달아 아는 복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모임에 있는 아이가 한 말 중에 가장 내 맘에 든 건 "선생님의 말은 절 많이 고민하게 합니다. 사실 나누고 가면서 내가 뭘 나누고 뭘 배웠나 잘 모르겠는데... 생활하다 보면 나눴던 말씀들이 자꾸 생각나 고민 합니다" 한 말이다. 사실 이 모임을 참석하기 위해 교회를 향하면서 난 늘 한쪽 마음은 편치 못하다. 왜냐면 아무래도 사람들을 자꾸 의식하게 된다. 그것도 청년부 사람들을... "어머? 젠 청년부면서 청년부는 나오지도 않으면서 그 시간에 얘들이랑 공부는 무슨??" "청년부라면 당연히 청년부가 우선이어야지..." "얼마나 잘 낫다고 그런데??" 그런 맘을 가지고 날 사람들이 혹 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사실 우리모임이 매주 은혜로운 건 아니다. 올해 여름휴가를 대만이 아닌 원주에 맞추면서(처음부터 내겐 대만은 있지도 않았지만...) 모두? 가는 대만과 나만? 가는 원주를 은근히 비교했다. 어디로 가는 것이 더 좋을까? 그러면서 대만이 훨씬 좋아보여 낙심했다.(사실 난 내가 낙심했는지도 몰랐다. 좀 우울한 줄로 알았지...) 그러면서 한켠으론 내가 뭔가를 대단히 아이들을 위해 포기하면서 이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어줍잖은 생각도 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런 내 모습들을 회개하고 나서야 시기심없이 기쁜 마음으로 원줄 갈 수 있었다.
청년부 회지 원고청탁을 받으면서 처음부터 난 교사에 관한 내용을 써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역시(?) 너무나 장황한 글이 되었는데... 교사란 이름으로 보냈던 이 시간들속에서 오직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변해가는 그릇의 모습만이 나타났길 바란다."그러므로 ~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유치부에선 1년 반을 있었다. 내가 한 일이라면 단 1번의 공과공부(정교사 대타-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어요)와 간이건물(그땐 유치분 간이건물이였다) 앞에 서서 오는 아이들을 맞고 문을 열어주는 거였다. 당시 아이들은 날 문지기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문지기가 된 것은 사실 돌아가면서 하다가 그냥 나보고 한 선생님이 하라고 해서... 그래서 시작된 거였고 아무도 그만 하라는 말이 없어 그래서 계속 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난 그 일을 했었다.
유치부 때 - 한 아이랑 싸웠다. 어른이 그것도 유치부 아이랑 싸운다는 것이 좀 웃기지만... 싸운 결정적인 이유는 내게 너무 무례했기 때문이였다. 보조라고 아이까지 날 교사로 보지 않아?? 그야말로 무시를 당했다는 느낌때문에 싸움은 시작됐고 난 계속 그 아이의 잘못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 아인 절대로 굽히지 않았고 결국은 그냥 그 아일 놓아줬고 내내 마음이 편칠 못했다. 그 아이를 아침에 싸운 이후로 계속 찾았다. 다시 만나서 해결하려고... 늘 교회에 있던 그 아인 보이질 않았다. 걱정스러웠다.(나중에 물어보니 친구내서 놀았단다) 한참만에 그 아일 만났다. 가서 내가 잘못한 것을 먼저 인정하고(내가 화가 나서 그 아이의 가방을 빼앗았었다.-물론 그 아일 놓아줄 때 주었었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너도 잘못했지? 물으니깐 그렇다고 그런다. 우리의 싸움은 서로 사과하면서 끝이 났다. 난 아이랑 싸우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배운 것 같다.
94년도 고등부를 지원했다. 기대감과 떨림으로...
3년차 때 - 수련회 기간 중이였는데 전에 가르쳤던 아이들이 날 위해 노래를 직접 개사해 불러줬다. 그 황송?한 찬양을 들으면서 받았던 감동은.... 그땐 교사라고 해서 아이들이 날 참 많이 대접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 대접받음이 교사를 하는 큰 기쁨이였던 것 같다.
3년차 때 - 길에서 우리반 여학생을 우연히 봤다. 정말 놀랐다. 교회올 때 그 아인 간혹 큰 쇼핑백을 들고 오곤 했는데... 거기에 그 옷들이 담겨져 있었나 보다. 난 그 아이가 당장이라도 나쁜길?로 빠져버리면 어쩌나 염려했고,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주일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만났다. 근데 이야길 하면서 사실 내가 한 말은 거의 없었다. 남자친구 얘기와 하고 싶어하는 일에 대해 계속 듣다가... 너 정말 인기 많구나? 그래.. 넌 그 일을 잘할 것 같아... 이정도로 대화가 끝난 적이 있었다. 그당시엔 어? 내가 도대체 뭘 한 거지?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셨던 것 같다. 그 아인 지금 교회에서 맡은 일을 잘 감당하고 있다. 한 아이랑 이야길 하기 위해 이때처럼 열심히 준비했던 적은 이후에도 없던 것 같다. 하나님이 왜 이런 방법으로 인도하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교사를 하면서 지금도 느끼는 것은 권면하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특히나 상처를 주지 않고 아이의 잘못을 찝어주는 것은 더구나...
4년차 때 - 야외예배를 가는 날이였다. 아이들이 5-6명 교횔 왔는데 다들 이유가 있어서 못간다고 그런다. 아이들에게 시간을 줬다. 다시 생각해 보고 대답해 달라고... 그래도 선약이 있다고, 피곤하다고... 성가대 때문에... 모두 못간다고 그런다. "반끼리 식사합니다."란 총무교사 광고가 왜 자꾸 생각이 나던지... 사실 학생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혼자 꿋꿋이 밥 먹을 자신이 정말 없었다.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울었더니 맘 착한 한 아이가 가겠다고 했다. 그 일을 통해 학생이 없어서 교사를 못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처음 느꼈던 것 같다. 그해 난 유난히 그 아이들과 공과를 하면서 많이 울었다. 그핸 선생님들의 변동사항이 많아서 내가 2반을 맡아야 했다. 아이들을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해 처음 알았던 것 같다. 아이들은 늘? 내 맘 같지 않았다. 대우받는다거나 감동받는다거나 뿌듯함 때문에 교사를 하던 나의 환상들이 드디어? 깨지기 시작한 해였던 것 같다.
5년차 때 - 그핸 교회 공사때문에 동신기도원에서 동계수련회를 했다. 첫날은 퇴근 후 교회까지 와서 자가용이 있으신 선생님 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근데 갑자기 자가용 있으신 선생님이 늦게 일이 마쳐질 것 같다고 미안해 하시며 전활하셨다. 어쩔수 없이 난 혼자 기도원을 찾아가야했다. 포천까지 가긴 했는데 기도원으로 올라가는 길이 깜깜해 전혀 걸어갈 수 없었다. 올라갔다 내려왔다 반복하다 결국 집으로 전화를 해 기도원에 전화를 부탁했고(사실 난 동신기도원 전화번홀 알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부장집사님이 봉고를 타고 나와 주셨고...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날은 머리를 쓴다고 써서 출근전부터 다른 선생님께 여기저기 전화를 하면서 내가 포천에 도착하여 삐삐를 하면 차를 가지고 좀 데리러 와 달라 부탁했다. 전날과 같은 고생은 하지 않으려고.... 둘째날은 비가 왔다. 퇴근 후 서둘러서 기도원을 향했다. 그날은 교대서부터 의정부 북부까지 거의 계속 서서 가야 했다. 많이 지쳤다. 북부역에서 내리니깐 비가 제법 많이 내렸다. 기도원 가는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서 내려 약속대로 삐삘했다. 근데.... 거의 30분이 지나도 날 데리러 나오는 차는 없다. 비가 그치긴 했지만 좀 추웠고, 포천이라 그런지 길에 탱크까지 여러대 지나다니곤 했다. 결국 50분을 기다린 후 난 기도원으로 전활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삐삐가 안터지는 지역이란다. 왜 진작 전화할 생각을 못했을까?) 들어가니깐 저녁집회가 끝나버렸고 후에 조금 기도회를 할려고 한단다. 정말 얼마나 서러운지... 엉엉 울었다. 기껏 잠잘려고 이곳에 온 건가? 도대체 여길 왜 온 건가? 왜 이렇게 미련한가? 등등 내 자신이 도무지 이해가 안되서 화가 났었다. 근데... 그날 난 정말 생각할 수도 없을만큼 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정신없이 간 이유를 알게 됐다. 나도 몰랐는데... 내겐 안가도 된다거나 안갈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거였다. 무조건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그 일을 통해... 그동안 교사란 비전을 가지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교사란 직업으로 분명히 인도하실 것이란 나의 믿음을 깨버리시고 별 상관도 없는 직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하나님을 통하여 여전히 교사의 사명을 가진 교사임을 알 수 있었다.
5년차 때 - 원주수련회때 일이다. 한 아이랑 문제가 있었다. 그때 난 너무 많이 화가 나고 맘이 상해 버려서 이젠 교사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말했다. 난 사실 교사가 아니였다면 당연히 내 은혜받기 위해 대산을 갔었을 것이다. 교사랍시고 원주를 온 것이 정말 후회 막심이였다. 다신 원주를 안오겠다 마음 먹었다. 괜히 교사를 해 사서 이 고생을 하다니... 이런 멍텅구리.... 수련회 내내 이 시험 때문에 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이 아까운 시간(일년에 단 한번 있는 휴가를 들여서)에 내가 하나님께 구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다니... 수련회가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그 아일 놓고 기도하고 울었다. 마지막날 후집회를 위해 옥수수를 먹는 시간에 그 아이랑 화해했다. 그 아인 문제가 생긴후론 계속 날 마주 치려고도 하지 않았고 내 말은 무조건 무시하고 있었다. 함께 얘길 하려던 날 매정하게 뿌리치고 가버렸다. 근데 그 완고하던 아이가 나랑 드디어 화해를 했다. 정확히 뭘 얻어가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 아이를 중심으로 용서했다. 그리고 정말 은혜로운 수련회였다고 감사하며 상경할 수 있었다. 수련회가 몇주 지난 후 난 그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6년차 때 - 그해는 교사를 하면서 가장 힘든 해였고 가장 큰 변화가 내게 있었던 해였다. 처음으로 고3을 맡았다. 기도하면서 내가 이 아이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 알고 있었다.(이전까진 난 항상 1학년만 맡았었다) 우리반은 유난히 아이들이 안(못?)나왔다. 난 항상 아무도 안오면 어째지 걱정하면서 주일을 맞아야 했다. 스승의 날 행사를 간단히 하고 야외예배를 갔다. 근데... 아이들은 아무도 못간다고 그런다. 두명이 왔는데... 둘다 못간단다. 새벽 5시 30부터 일어나서 준비하고 나온 나인데.... 그것도 아이들 먹을 도시락까지 대신 다 싸가지고 왔는데.... 또 아무도 안간단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꾹 참고 있었다. 어쨌든 한 아이가 끌려가게 됐고.... 얼마나 고맙던지... 그 아인 점심을 먹고 딴 친구들이랑 공부한다며 먼저 갔다. 야외예배를 마치면서 끝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반별 사진을 찍는 시간에 난 구석에 조용히 서 있어야 했다. 다행인지 사람들은 반별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여 내겐 시선을 않줬다. 난 그해 반별 사진을 찍지 못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면서 하나님께 내가 정말 이런 교사를 왜 해야 하는지 물었다. 속이 정말 많이 상했다. 근데... 난 그때서야 처음 알게 됐다. 아이들 때문에 내가 교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때문에 교사로 존재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그래서 이정도로 낙심하는 것은 그분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나님 그분이 "야. 너 어디 시험받아 낙심이나 해라... 설마 그런 의도로 내게 교사를 맡기셨겠는가??"하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론 아이들이 안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서 좀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번은 또 아무도 안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난 한명도 수련회를 갔다 오지 못한 우리반 아이들을 위해서 수련회때 배워온 말씀을 다시 공부해 공과시간에 알려줄 때였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란 제목으로 공부를 해 갔는데... 아무리 아이들을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난 계속 기도하길... "하나님 이 공과는 꼭 해야 되는데요." 그리고, 난 공과를 할 수 있었다. 어쩐 일인지 한 선생님이 조금 늦게 오셨는데(늦는 선생님이 아니셨는데)... 그반 아이가 나에게 와서 "어? 선생님은 학생이 없고 저는 선생님이 없네요?... 같이 공부할까요" 제안하는 거였다. 그래서 공과했다. 그것도 6명정도의 다른 반 학생과 그반 선생님과... 거의 끝날 때 온 우리반 1명과 함께.... 그때 난 정말 교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하는 거 였구나를 재확인할 수 있었다. 고등부 교사를 한지 6년만에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교사가 뭔지를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그동안을 돌아보니깐 정말 학생들로 인해 받은 감동과 기쁨이나 간혹 드는 뿌듯함이 내가 교사를 하는 이유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학생들로 인해 무시를 당한다거나 속상한 일들을 겪게 될땐 교사? 나 안해.. 그런 맘을 먹었던 것 같다. 교사란 것을 그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된다는 그 정도로 생각해 왔던 거였다. 그해 난 다신 원주 안가겠다던 작년의 굳은 결심?을 까마득히 잊은채 큰 기대를 가지고 수련회에 참석했고 하나님 그분만을 위해 존재하는 교사의 기쁨을 난생처음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니가 그 일을 가장 잘하기 때문에 내 부탁하는 건 아닌데... 난 니가 그 일을 날 위해 해줬으면 정말 좋겠구나. 해 줄 수 있겠니?" 물으심에 기꺼이 "Yes"로 답하는 commitment.의 헌신을 처음 배울 수 있었다.
7년차 때 - 지난 연말부터 은연중 기도제목 하나가 아이들과 스터디하는 것였다. 마음만 있을 뿐이였다. 하곤 싶지만 시간투자할 생각을 하니... 망설였다. 그러면서 지금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근데 느닷없이 총무선생님 왈 "성경공부를 자원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선생님을 붙혀달라고 하는데 한 번 해 보시겠어요" 물으신다.(그날 난 교사회의도 못들어 갔다. 오랜만에 온 아이가 있었는데 교회를 그만다니겠다는 선언을 했기에... 아이 이야길 열심히 들어줬다. 몇 달이 지난 후 난 쪽지를 받았다 그 아이로부터...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라는 말씀이 적혀있었다.) 총무선생님의 질문에 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3 or 4월? 뭐 그때부터 시작됐던 것 같다. 근데 난 첫모임부터 실망했다. 한 아이왈 "선생님 고3이 2명이나 있으니깐 조금 하다 그만하죠." 말하는 거였다. 시작도 안했는데... 자원하는 아이들이 정말 말씀을 함께 나누려는 모임이라는 말을 듣고 시작했는데(사실 난 그 자원이란 말 때문에 시작한건데).... 실제 이 모임은 들었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모임이름이 분명 큐티모임인데... 아이들 중엔 큐티가 뭔지도 모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큐티를 안하고 있는 아이가 거의 다였다. 시작하긴 했지만... 사실 나로썬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괜히 한다고 했군.... 계속 후회했다. 더욱이 좀 쉴수 있는 토요일 오후시간을 청년부도 안나가고 있던 내가 그것도 왕복 2시간 반을 걸려 매주 나가야 한다는 것이.... 고3아이 2명과 상의했다... 너희들이 언제라고 그만하고 싶다면 난 그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쁨 맘으로 OK할꺼라고... 그랬더니 그 아이들왈 계속 하잖다. 어쩔 수 없이 난 너희들이 단 한명이라도 하자고 한다면 그 한명을 위해서라도 나오겠다고 약속을 해버렸다. 우리 모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수련회를 갔다온 후였다. 그쯤엔 한명만이 나왔다. 2시간정도 함께 생활을 나누고 말씀을 나누는데.... 언제부턴가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깨달아 내게 그들이 깨달은 것을 나눠준다. 또한 그들속에서 크진 않지만 작은변화가 보여졌다. 당연히 그 변화의 원동력은 말씀이였고... 여지껏 7년동안을 고등부안에서 있었는데... 이 모임처럼 말씀을 함께 나누는 기쁨을 누렸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어느때서부턴가 그 모임을 갈 때 난 교사로 가지 않게 됐다. 사실 그 모임엔 교사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난 사실 이 모임에 참석하면서부터 하나님께 말씀을 잘 깨달아 아는 복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모임에 있는 아이가 한 말 중에 가장 내 맘에 든 건 "선생님의 말은 절 많이 고민하게 합니다. 사실 나누고 가면서 내가 뭘 나누고 뭘 배웠나 잘 모르겠는데... 생활하다 보면 나눴던 말씀들이 자꾸 생각나 고민 합니다" 한 말이다. 사실 이 모임을 참석하기 위해 교회를 향하면서 난 늘 한쪽 마음은 편치 못하다. 왜냐면 아무래도 사람들을 자꾸 의식하게 된다. 그것도 청년부 사람들을... "어머? 젠 청년부면서 청년부는 나오지도 않으면서 그 시간에 얘들이랑 공부는 무슨??" "청년부라면 당연히 청년부가 우선이어야지..." "얼마나 잘 낫다고 그런데??" 그런 맘을 가지고 날 사람들이 혹 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사실 우리모임이 매주 은혜로운 건 아니다. 올해 여름휴가를 대만이 아닌 원주에 맞추면서(처음부터 내겐 대만은 있지도 않았지만...) 모두? 가는 대만과 나만? 가는 원주를 은근히 비교했다. 어디로 가는 것이 더 좋을까? 그러면서 대만이 훨씬 좋아보여 낙심했다.(사실 난 내가 낙심했는지도 몰랐다. 좀 우울한 줄로 알았지...) 그러면서 한켠으론 내가 뭔가를 대단히 아이들을 위해 포기하면서 이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어줍잖은 생각도 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런 내 모습들을 회개하고 나서야 시기심없이 기쁜 마음으로 원줄 갈 수 있었다.
청년부 회지 원고청탁을 받으면서 처음부터 난 교사에 관한 내용을 써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역시(?) 너무나 장황한 글이 되었는데... 교사란 이름으로 보냈던 이 시간들속에서 오직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게 변해가는 그릇의 모습만이 나타났길 바란다."그러므로 ~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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